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중 공방전 (문단 편집) === 정군산 전투 === >유비가 양평에 주둔하자 장합은 광석에 주둔했다. 유비가 정예병 1만 여명을 10부로 나누고 밤중에 장합을 급습했다. 장합은 친병(親兵)을 이끌고 치열하게 맞서 싸웠고 유비는 이길 수 없었다. 그 뒤 유비가 주마곡에서 도시 주변을 불태웠다. 하후연이 불을 끄러 다른 길로 왔다 유비와 서로 만났다. 단병(短兵)으로 서로 칼을 맞부딪치며 교전하다 마침내 하후연이 죽었고 장합은 양평으로 돌아왔다. >---- >《정사 삼국지》 장합전 ---- >건안 24년(219년) 정월, 유비가 밤에 녹각(鹿角)을 불사르며 포위하자 하후연이 장합에게 동쪽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경병(輕兵)을 이끌고 남쪽을 지켰다. 유비가 장합에게 싸움을 걸었는데 장합군이 불리했다. 하후연은 지휘하던 병력의 절반을 나누어 장합을 돕게 했는데, 유비의 습격을 받아 마침내 하후연이 싸우다 죽었다. 시호를 내려 민후(愍侯)라 했다. >---- >《정사 삼국지》 하후연전 ---- >건안 24년(219년), 한중(漢中) 정군산(定軍山)에서 하후연을 공격했다. 하후연의 군대는 매우 정예했으나 황충은 적의 예봉을 꺾어 어김없이 전진하며 사졸들을 격려하여 이끌고, 징과 북소리는 하늘을 울리고 환성은 골짜기를 뒤흔드니, 한 번 싸움으로 하후연을 참(斬)하고 하후연의 군대를 대패시켰다. 정서장군(征西將軍)으로 올랐다. >---- >《정사 삼국지》 황충전 ---- >법정이 말했다. “가히 공격할 만합니다.” 선주가 황충(黃忠)에게 명해 높은 곳에 올라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며 이를 공격하게 하여 하후연군을 대파했고 하후연 등은 참수당했다. 조공(曹公)이 서쪽을 정벌하며 법정의 계책임을 듣고 말했다.“나는 예전부터 현덕(玄德 - 유비)이 이 같은 일을 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으니 필시 남의 가르침을 받았을 줄 알았다." >---- >《정사 삼국지》 법정전 218년 9월 조조는 마침내 군을 일으켜 장안에 주둔하나 그 후 [[하후연]]을 도와주기는커녕 장안에 주둔하면서 사태를 그냥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단순히 후방에 주둔해 든든함을 [[유비]]에게 과시하려는 의도였을 수도 있었겠지만 하후연 군의 상황이 유비군의 맹공에 힘들었던 점을 감안하면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는 못한 셈이다. 직접 와서 결전의 의지를 보여주고도 실제로 현지 사령관에게만 맡기고 관망하는 점은 분명 이전의 조조가 보여준 전략적 판단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조조가 본거지를 떠난 이 와중에 완에서는 동리곤의 많은 노역 부여에 [[후음]]을 비롯한 백성들의 반발로 반란이 일어나는 등 내부에서 소란이 끊어지질 않았는데 조조가 반란 진압이나 하후연 구원 중 어느 쪽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 상당히 의문스럽다. 당시 위의 상황을 고려하면, 한중을 그냥 밑도 끝도 없이 방치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정말로 여력이 없어서 못 도와주고 있었던 것'''일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반란 진압이야 [[조인]]에게 맡기면 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후음의 난에서 그와 연계한 배후가 [[관우|누구인지]] 생각하면 그는 결국 후일의 근심거리를 스스로 만들어낸 셈이다. 하후연 참살 이후 발언을 보면 그동안 조조 본인이 유비를 격파하던 것을 생각해서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느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이미 유비의 역량은 이전에 조조가 생각하던 그때와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해를 넘기는 지루한 대치 상태에서 먼저 공습을 가한 건 유비였다. 그는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 양평(陽平)으로부터 남쪽으로 면수(沔水)를 건너 산을 따라 점차 전진하여 정군산으로 주둔지를 옮긴다. 면수에도 조조군이 주둔해 있었을 터이므로 유비는 그 지역의 조조군을 격파했을 것이고, 그래서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태를 파악한 하후연과 장합 역시 정군산에서 유비를 몰아내기 위해 대군을 동원해 공격을 가했지만 이미 요지를 장악한 유비는 주도권을 쥐고 기세를 타고 맹공을 퍼붓는다. 때마침 유비와 [[법정(삼국지)|법정]]은 조조군을 상대할 계책을 다 수립해 놓은 상태였고 한중공방전의 가장 화려한 전투가 이로서 막을 올렸다. 시작은 하후연 주둔지 동쪽의 주마곡을 지키고 있건 장합의 주둔지였는데 유비는 군사 1만을 선발해 10개 기습부대를 만들어 야습을 가하는 전술을 구사한다. 장합 역시 이에 치열하게 맞섰지만, 화공까지 동원해가면서 전례없는 치열한 전투력을 보이는 유비군의 공세에 밀리기 시작했고 결국 [[장합]]은 본영인 하후연 군에 구원을 요청하는 지경에 이른다. 하지만 바로 그 지원 요청이 유비의 노림수였다. 물론 장합이 그 급박한 상황에서 유비의 의도를 알아차리는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유비의 의도를 알아챘더라도, 하후연과 장합은 이미 외통수에 몰린 상황이었기 때문에[* 당시 유비군의 계획은 하후연이 장합을 도울 경우 하후연을, 하후연이 장합을 돕지 않거나 장합이 하후연에게 구원을 요청하지 않을 경우 장합을 노려서 누가 됐든 한 명을 확실하게 잡는 계획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장합의 지원요청을 받은 하후연이 즉시 군사의 절반을 원군으로 보내준 사실을 통해 당시 장합이 단순히 수세에 몰린 정도가 아니라 [[풍전등화]]의 위기상황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는데, 이는 단순히 [[성동격서]]를 위한 낚시성 공격이라기에는 너무 과한 전력이다. 즉 상황이 어떻게 되든간에 일단 적의 수장을 조지고 보자는 것이었다. 이러니 장합이 하후연에게 원군을 요청할 수밖에. 만약 장합이나 하후연이 각개격파를 피하기 위해 자신의 진지를 버리고 합류하게 된다면 남정으로의 진격로를 내주게 되며 보급로를 차단당할 수 있으므로 역시 힘든 선택이다.] '일단 주마곡의 급한 불을 최대한 빨리 끈 다음 하후연을 노리는 기습이 있을 경우 그걸 어떻게든 막아내는' 것 말고는 마땅한 방법도 없었다. 급보를 받은 하후연은 바로 군사의 절반을 장합에게 지원해 주었지만, 정군산에 올라 이미 상황을 파악하고 있던 법정은 마침내 이 공격의 진정한 목적인 하후연군의 격파시기가 왔다고 보고했다. 이 모든 것은 처음부터 한중방면 사령관인 하후연을 참살해 한중 조조군의 지휘체계를 무너뜨리려는 계획이었던 것이다. 이에 장합을 공격하는 군사 말고 또 다른 기습부대가 하후연을 향해 돌입한다. 장합을 공격한 군세가 후속부대는 걱정없을 정도로 장합을 몰아붙이던 유비군의 정예였던 만큼 이 부대는 그보다는 미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이 부대를 이끄는 지휘관은 유비군의 히든카드이자 [[관영]]에 비견되는 맹장 [[황충]]이었다. 이들은 여기저기 사방을 돌아다니면서 하후연군을 공격하고 녹각에 불을 지르며 파괴했는데 징과 북소리가 하늘을 울리고 병력이 이곳을 쳤다 저곳을 쳤다 어김없이 전진하였다 하니 그 기세가 얼마나 급작스럽고 번개 같았을지 짐작이 된다. 하후연은 녹각을 수리하고 직접 황충을 상대로 맞서기 위해 자신에게 남아있던 정예병력들을 이끌고 출진하지만 이미 전략, 전술 단계에서 수세로 밀려 완전히 악전고투하고 있던 상황에서 맹장 황충의 맹렬한 공격까지 받아내니 어찌할 수가 없었다. 결국 황충은 녹각을 수리하던 위의 군단장 하후연을 참살하고 그의 정예병력을 모조리 대파하는 대공을 세운다.[* 정사에는 一戰斬淵이라는 구절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황충이 하후연을 직접 베었다고 볼 수는 없다.] 이때 조조가 법정의 계책임을 듣고 "내가 그럴 줄 알았다. 유비는 그런 수를 쓸 수 있는 놈이 못 됨 ㅇㅇ"이라고 까는 부분이 흥미로운데, 이에 대한 [[배송지]]의 의견이 재미있다. >'신 송지가 보건대, 촉과 한중은 입술과 이의 관계와 같으니 유주(劉主-유비)의 지모가 어찌 이에 미치지 못하겠는가? 장차 계략을 펼치기 전에 법정이 먼저 말했을 뿐이다. 무릇 좋은 모책을 들어 써서 공업을 이루는 것은 패왕된 자로서 누구나 그러하지 않던가? 위무(魏武-위무제 조조)가 이를 남의 가르침으로 여겼다면 또한 용렬하지 않은가! 이는 아마도 욕되고 한스러운 나머지 한 말로, 사실을 헤아려서 마땅한 말을 한 것은 아니다.' 즉 [[정신승리|패배하고 하후연이 죽은 데 빡쳐서 별 생각없이 한 말]]이라는 것. [[화용도]]에서 패퇴하여 돌아는 형편에 "유비는 나의 맞수이나 다만 계책을 쓰는 것이 부족하고 늦구나. 만약 일찍이 불을 놓았다면 내가 비견될 바가 아니었을 것이다."하고 비웃은 것이나 [[적벽대전]] 이후 "[[곽가]]가 살아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지지 않았을 텐데"와 비슷한 급이라는 이야기. 쉽게 얘기해 [[허세]].[* 애초에 휘하에 부리는 참모들의 전략을 적제적소에 쓰는 것도 지휘관의 역량이다. 조조 본인도 휘하에 수많은 브레인들을 두고 그들을 잘 활용하지 않았던가. 조조는 물론이고 혼자 대업을 이룩하는 군주는 없다. 유비가 부리는 법정의 계략으로 유비가 승리했다면 당연히 유비의 합당한 승리이지 비웃음 당할 거리가 전혀 아니다.] 조조는 장합을 몰아붙이고 하후연을 참살한 군사적 활동은 총사령관 유비가 직접 지휘한 것임에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애당초 이런 고단수의 전략으로 적군의 사령관을 완전히 박살내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히려 처음부터 사령관의 목을 노리고 이를 실행한 유비와 법정의 책모가 괴이하게 느껴질 정도였고 조조 역시도 자신이 영웅으로 보고 있고 음험하면서도 인덕을 갖춘 기이한 인물 정도로 알고 있던, 아니 알고 있었다고 여기던 유비의 역량이 상상 이상이었음에 내심 놀랐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위략에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비록 하후연이 도독(都督)이었으나 유비는 장합을 (두려워해) 꺼린 반면 하후연은 경시했다. 이에 하후연이 죽자 유비가 말했다, "응당 우두머리를 잡아야지, 이 자를 잡아서 무엇하겠는가!" 이는 휘하 장수들을 독려하기 위한 발언임과 동시에 장합에 대한 경계에서 나온 말인 듯하다. 장합은 당시 한중군의 2인자였고 <무제기>, <하후연전>, <장합전>, <서황전>을 보면 한중을 가기 위한 무도(하변) 진입부터 조조의 한중(장로)정벌과 파군 점령을 위한 전투에서 활약하였다. 조조의 한중 정벌을 보면 실제로 군대를 이끌고 실제 전투 및 평정을 하러 다닌 인물이 장합이니, 유비가 장합을 더 우선시 한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즉, 본인이 추후 한중, 무도, 파군에 영향력 및 과시를 하기 위해서는 (그 부근의 저족 등의 이민족이나, 민심에 대한 영향력) 실제로 그 지역 거주민들이 직접 보고 겪은 장합을 격파하는 것이 더욱 유리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것이다. >'하후연이 살해된 후, 군대안의 인심은 불안하였다. 곽회가 흩어진 병사들을 모아 탕구장군 장합을 군주로 추천하자 각 진영은 비로소 안정되었다. 그 다음 날, 유비가 한수를 건너 공격해 오려고 했다. 각 장수들은 의논한 결과, 중과부적이고 유비가 승리의 기세를 타고 있는 이상 물에 의지하여 진을 만들고 유비에 대항하려고 했다. 곽회가 말했다. > >『이것은 우리들의 연약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적을 꺾기에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물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진을 쳐서 적을 유인하여 반쯤 건넌 후에 공격하는 것만 못합니다. 반드시 유비를 무찌를수 있을것입니다.』 > >진을 친 후, 유비는 의심스럽게 여겨 건너지 않았다. >---- >《정사 삼국지》 <곽회전> 하후연이 죽자 위군은 크게 흔들렸다.[* 하후연의 전사로 인해 당시 한중 방면에 주둔했던 조조군의 지휘체계가 붕괴되었고 결국 한중 공방전 동안 제대로 회복되지 못했으며 조조가 한중에서 퇴각하는 가장 큰 원인으로 작용하고 말았다. 또 이 싸움에선 익주자사 조옹도 전사하였다.] 일단 비어 있는 사령관은 장합에게 맡기고 곽회의 기책으로 한수 안쪽에 진을 치고 유비가 도하하는 사이 기습하자는 의견을 냈으나 이것 역시 유비가 강가의 복병을 파악해 도하하지 않았다. 이렇게 곽회의 기책으로 강을 넘어오는 것은 막았으나 전선은 중과부적이었다. 이에 장안에 있던 [[조조]]가 움직이기 시작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